[수사반장] 제주판 살인의 추억, '무스탕 입은 돼지'로 범인 잡았다

조선일보 0 74 05.17 07:13

‘제주판 살인의 추억’ 장기미제 사건
‘무스탕 돼지’ 실험으로 사망일자 특정
9년 만에 잡힌 건 택시기사

국내 최초 동물 사체 부패 실험이 시작된 지난 1월 29일, 무스탕을 입은 돼지가 보육교사 이모씨의 시신이 발견된 제주 애월읍 고내봉 근처 농지 배수로에 놓였다. /제주지방경찰청 제공

지난 2월 23일 새벽 제주 애월읍 고내봉 부근 농지(農地). 제주지방경찰청 소속 형사들이 돼지 사체(死體)의 네 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인근 농수로에 옮겼다. 돼지는 밤색 무스탕을 입고 있었다. 무스탕 안팎에는 온도·습도·조도(照度) 측정기를 5개씩 부착했다. 국내 과학수사 역사상 최초의 동물사체 부패 시험이었다. 소방차 협조를 받아 인공 비도 뿌렸다.

경찰은 이날부터 3월 2일까지 ‘무스탕 돼지’ 사체의 부패 정도를 측정했다. 장기 미제(未濟)로 남아 있는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용의자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지난 1월 29일, 제주지방경찰청 형사들이 돼지 사체를 제주 애월읍 고내봉 근처 농지 배수로로 옮기고 있다. /제주지방경찰청 제공

9년 전, 이 농수로에서 숨진 보육교사 이모(당시 27세)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당시 이씨는 하의가 벗겨진 상태로 무스탕 외투만 입은 상태였다.

어린이집 보육교사 이씨는 2009년 1월 31일 여고 동창들과 만나 제주시내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술자리는 하루를 넘긴 새벽 2시45분까지 이어졌고, 친구들과 헤어진 이씨는 다시 남자친구를 만났다. 두 사람은 남자의 흡연문제로 말다툼을 했고, 이씨는 콜택시를 불러 먼저 떠났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씨는 귀가하지 않았고, 이튿날 가족 실종신고로 수사가 개시됐다. 경찰은 이씨의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통해 2월1일 새벽 4시4분쯤 애월읍 광령초등학교 기지국 인근에서 전원이 꺼진 것을 확인했다.

사체가 발견된 것은 실종 7일 만인 2월 8일이었다.
이씨의 가방은 광령초 기준으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숲에서, 시신은 북서쪽 10km 거리의 농수로에서 발견됐다. 범인이 수사에 혼선(混線)을 주기 위해서 여기저기에 증거물을 뿌린 것이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인적이 드물어 주변 CCTV도 없었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곳은 콜택시 회사였다. 경찰은 제주도 택시기사 5000여 명을 전수(全數)조사했다. 통신기록·운행기록 장치인 ‘타코미터’ 분석으로 범위를 압축했고, 이 과정에서 박모(49)씨가 유력 용의자로 떠올랐다. 그는 “그날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고 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남자 손님을 모셨던 것 같다”며 진술을 뒤집었다.

핵심은 사망시점이었다. 부검의는 △시신이 거의 부패되지 않았고 △시신 온도(13도)가 대기온도(9.2도)보다 높은 점 등을 근거로 “시체발견일(2월 8일)로부터 24시간 이내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보통 시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기온도보다 온도가 낮아진다. 이 경우는 시신온도가 높아 숨진 지 얼마 안 됐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다. 경찰은 이씨의 사망시점을 2월 7~8일 사이로 특정했다.

경찰은 택시 타코미터, 주변인 진술 등을 종합, 박씨가 사망시점(2월 7~8일) 사이에 범행장소 부근에 없었다고 결론냈다. 알리바이가 입증된 것이다. 유력 용의자였던 택시기사는 살인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이후 수사는 제자리 걸음이었고, 결국 사건 발생 3년 만인 2012년 6월 수사본부가 해체됐다. 도민들은 이 사건을 ‘제주판 살인의 추억’이라고 했다.

9년 만에 반전이 일어났다. 2016년 제주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이 재조사를 결정한 것이다. 박씨가 다시 용의선상에 올랐고, 사망시점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김기헌 제주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이 동물사체 부패실험을 제안했다. 사망시점과 유사한 환경에서 동물 사체가 부패하는 정도를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이정빈 가천대 법의학과 석좌교수가 실험을 맡았다. 사망당시 피해자의 복장을 돼지를 통해 재연했다. 돼지가 무스탕을 입게 된 것이다.

올해 1~3월 사이에 4번의 실험을 했다. 사망 당시와 가장 유사한 대기환경과 맞추기 위해서다. 2월 23일~3월 2일 마지막 실험에서 ‘무스탕 돼지’ 온도가 대기 온도보다 높게 나타났다. 무스탕이 보온(保溫)을 했고, 농수로 양옆의 콘크리트가 바람막이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이씨가 2월 1일 새벽 3시부터 사흘 이내에 사망했다는 새로운 결론이 나왔다.

박씨의 ‘알리바이 방패’도 비로소 깨졌다. 2009년 2월 1일 그의 택시 이동경로가 범행 경로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지난 16일 오전 8시20분쯤 박씨를 경북 영주에서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피의자로 긴급 체포했다. 그는 택시기사를 관둔 뒤, 경북으로 터전을 옮겨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었다.

제주 보육교사 살인 사건 유력 용의자 박모씨가 지난 16일 오후 제주국제공항 1층에서 경찰에 압송돼 대합실을 빠져나오고 있다. 박씨는 이날 오전 8시20분쯤 경북 영주시에서 체포됐다. /뉴시스

경찰은 박씨 주거지·사무실에서 발견한 휴대전화에서 지난 9일 ‘보육교사 살인사건’을 집중적으로 검색한 사실도 확인했다. 이날은 제주에서 보육교사 살인사건 용의자가 압축됐다는 보도가 나온 날이다. 과학 수사로 숨진 이씨의 피부조직에서 사망시점 당시 박씨가 착용했던 셔츠의 미세한 실오라기가 발견된 점도 증거로 추가됐다.

현재 박씨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물증을 하나씩 들이대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고 전했다.

“미국에서는 실제 시신으로 실험하기도 하는데 아직 한국에서는 이것이 불가능 합니다. 결국 사람의 시체와 부패 양상이 흡사한 돼지에 무스탕을 입혀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동물로 실험한다는 것에 윤리적 비판도 받습니다만… 억울한 죽음이 없으려면 동물 사체 실험은 꼭 필요합니다.” 동물사체 실험에 참여한 송태화 경찰수사연수원 교수 얘기다.

경찰은 강간 살해 혐의로 박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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