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출격한 날, 이틀전 산화한 후배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동아일보 0 97 05.29 20:45
93세가 된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의 최근 모습. 용인=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93·예비역 대장)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 최초로 100차례 이상 전투기 출격을 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100회 출격을 한 영광의 그날이 그에겐 전쟁 중 가장 착잡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가 겪은 6·25와 소회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3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급한 대로 여의도 논둑에 몸을 숨겼다. ‘저거 다 부서지면 큰일인데. 한 번 타보지도 못했는데….’ 애태우며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정오였다.

북한군 야크 전투기 대여섯 대가 여의도 공군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곧장 격납고(항공기 보관·정비 시설)에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격납고는 벌집이 됐다.

격납고엔 T-6 10대가 있었다. T-6는 그해 5월 초까지 캐나다에서 들여온 ‘건국기’였다. 비무장 정찰기밖에 없던 공군을 위해 국민 성금 3억5000만 원을 모아 마련한 훈련기였다. 6월 25일까지도 공군엔 전투기가 없었다. T-6는 그나마 전투기 대신 투입해볼 만한 유일한 기종이었다.

나는 T-6 탈 날만 고대하던 스물세 살 중위였다. 종이연 수준의 L-5, L-4 정찰기만 조종하던 내게 T-6는 꿈의 항공기였다. 그 귀한 항공기가 눈앞에서 고철이 될 위기였다.

○ 200대 vs 0대

25일 아침 서울은 평온했다. 장승백이 하숙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오전 9시쯤 동기 전봉희 중위와 함께 노면 전차를 탔다. 극장에 가던 길이었다.

한강인도교에 들어서던 찰나 비행기 굉음이 전차를 뒤덮었다. 당시 공군 항공기는 L-4, L-5 정찰기 12대와 T-6 10대가 전부였다. 하늘에 낯선 항공기 2대가 보였다.

“이야, 저 비행기는 뭐지?” 얼마 전 영국 항공모함이 인천항에 입항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 사이렌이 울렸다. 헌병 차량이 질주해왔다. “국군 장병은 즉시 부대로 귀환하라.” 안내방송이 반복됐다. 항공기 정체는 북한군 전투기였다.

공군 조종사임에도 북한군 전투기를 몰라볼 만큼 우리는 전투기에 대해 무지했다. 이튿날 등장한 미군 F-80 전투기 연료 탱크를 보고는 비밀 무기라고 여길 정도였다. 북한은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와 지상공격기를 200대 가까이 확보해놓고 있었다. ‘전투기 한 대 없이 어떻게 싸우나….’ 군용 차량을 타고 여의도로 가는 길. 막막함이 밀려왔다.

○ 전투기 없는 맨손 전투

[2]김 전 총장이 2015년 6월 88세로 전투기를 탄 뒤 후배 조종사들의 축하를 받는 장면. [3]한국군 최초로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웠던 1952년 1월 당시를 재현한 것이다. 공군 제공
그날 저녁 L-5를 타고 문산(경기 파주시) 상공에서 내려다본 전황은 서글펐다. 북쪽에선 소련제 155mm 포가 남쪽을 향해 무더기로 불을 내뿜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포탄은 없었다. 군인 한 명이 105mm 포를 끌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 정도 열세면 나는 정찰기만 타다가 죽겠구나.’ 죽을 운명이라면 T-6 훈련기를 타다가 죽고 싶었다.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26일 밤 기회가 왔다.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T-6 탈 자신 있나”라고 물었다. T-6를 타던 선배들은 미군 F-51D 전투기를 긴급 지원받기 위해 그날 일본으로 갔다. 그 덕에 온 기회였다. 다행히 격납고에 있던 T-6 중 9대는 북한군의 집중 포화가 비켜가 멀쩡했다.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27일 동이 트기도 전에 여의도기지로 달려갔다. 아무리 조종이 쉬운 기종이라도 기종 전환 훈련에는 2, 3개월이 걸린다. 나는 교관도 없이 1시간가량 비행한 뒤 T-6로 전환했다. 전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곧바로 문산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됐다. 단번에 끝장내겠다는 패기와 달리 철교 인근 상공에서 구름에 갇혀버렸다. 구름 속에선 계기(計器)비행(계기에 의존해 고도 등을 측정해 비행하는 것)을 해야 하지만, 나는 계기비행 훈련을 못 받은 상태였다. 기체가 뒤집혔다. 추락하던 비행기는 지표면을 40m 남겨두고서야 수평을 되찾았다. 후방석 정비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렸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날 공군은 후방석 탑승자가 폭탄을 안고 있다가 100여 m 초저고도에서 맨손으로 투하해 가며 싸웠다. 폭탄걸이가 있는 건 항공기 22대 중 2대가 다였다. 경기 의정부, 서울 미아리고개 등 북한군이 내려오는 전선 곳곳에서 소형 폭탄 270발을 거의 다 썼다. 공군이 보유한 폭탄 전부였다. 북한군 전차 대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역대 최강의 소련제 T-34 전차 240여 대에 장갑차까지 앞세우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고민했다.

○ 운 좋은 사람

27일 저녁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공군은 수원으로 철수했다. 나는 이후 대전 등으로 기지를 옮기며 출격을 거듭했다. 수차례 죽을 위기를 겪었다.

7월 6일 T-6를 타고 평택에 갔다가 시커멓고 긴 행렬을 발견했다. T-34 전차였다. 모두 몇 대인지 확인하는 순간 전차포 수십 발이 날아들었다.

7월 9일엔 충북 음성의 북한군 포진지에 집결해있던 트럭을 목표로 폭격에 나섰다. 폭격 결과를 확인하려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조종석과 날개를 잇는 부분에 대공포 탄흔이 선명했다. 간발의 차이로 조종석을 비켜갔다. 전쟁 기간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전쟁은 계속됐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조종사는 늘었다. 6월 30일 조명석 대위(추서 계급)를 시작으로 공군이 연이어 전사했다. 조종사들은 공포심을 잊으려 출격 전날 밤에도 술을 마셨다.

1951년 5월엔 조종사 한 명이 여의도기지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1950년 7월 도입된 F-51D 전투기를 타고 몇 차례 출격했던 그는 “내가 죽으면 애랑 마누라는 어떡하나” 하며 울었다. 우리를 교육하고 함께 출격하던 딘 헤스 미 공군 중령이 위스키를 따라주며 그를 달랬다. 통곡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 최초 100회 출격의 슬픔

개전 후 1년 반 가까이 나는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다. 두려움과 공포는 남의 일이라 여겼다. 그런 내게도 죽음의 충격이 찾아왔다. 1952년 1월 9일이었다.

그날 F-51D 3대로 편대를 이뤄 출격했다. 1950년 10월부터는 나도 F-51D를 탔다. 강원 원산 철도 조차장, 금강산 부근 창도리 일대 북한군 보급기지를 폭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문제는 창도리에서 발생했다. 나와 다른 조종사가 1, 2차 폭격을 한 뒤 후배 이일영 중위(추서 계급)가 폭격하는데 대공포탄이 날아들었다. 이 중위 전투기가 땅에 내리꽂혔다.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저공비행을 하며 그를 찾아 헤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강릉기지로 돌아오는 50분 동안 나는 백지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조종했을 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비행할 때면 늘 후련했던 하늘이 그날은 버거웠다.

그간 동료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눈앞에서 동료가 전사한 건 처음이었다. 기지에 돌아와 그의 전사를 보고했다. “뭐 어떻게 하겠나”라는 읊조림이 돌아왔다.

이틀 뒤, 북한군 보급기지를 파괴한 후 강릉기지에 착륙하자 정비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한국군 최초의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했다고 했다.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쳤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일영이 시신을 찾아야 하는데….’

1952년 1월 13일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된 것을 끝으로 경남 사천기지로 갔다. 후배 조종사 양성 임무를 부여받고서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다. 하늘에 바친 청춘들을 생각하면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채 휴전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 40년 만의 비행

2015년 6월 23일. 원주 공군기지에서 40년 만에 조종복을 입었다. 최초의 국산 전투기 FA-50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국산 전투기를 꼭 한 번 타보고 싶었다. 비록 후방석에 앉았지만 88세이던 나는 20대 조종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상공에서 본 조국은 아름다웠다. 6·25 때 산야는 헐벗은 황톳빛이었다. 1950년 8, 9월 T-6를 타고 정찰한 낙동강과 인근의 산은 핏빛이었다. 유엔 공군의 공습이 한 차례 끝나면 능선엔 북한군 시체 수백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나라가 초록빛이 돼 있었다. 고속도로까지 뻗어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했다.

올해 1월 9일엔 이일영 중위 추모식에 다녀왔다. 생전에 이 중위가 전사한 곳에 가보고 싶다.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강산댐이 생겼다는데 그가 산화한 곳이 수몰되진 않았을까. 일영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덕담이나 나누며 함께 늙어갈 텐데. 해마다 6·25가 되면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난다.

6·25 기간 공군 수십 명(조종사 27명 등 84명)이 전사했다. 그들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젊음을 창공에 묻었다. 그들의 희생이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여생엔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한다. 전쟁은 비참한 일이다. 그런 비참한 일이 후대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말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 마음으로는 아직도 현역 시절처럼 창공을 가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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